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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사후 고려의 정치 혼란과 개혁 세력

by 역사 연구 2026. 10. 10.

공민왕이 세상을 떠난 뒤 고려의 정치는 왜 다시 혼란에 빠졌을까요? 우왕 시기의 권력 다툼과 권문세족의 영향력, 신진사대부의 개혁 요구, 이성계의 성장을 살펴보며 고려 말 새로운 정치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지금 확인해 보겠습니다.

공민왕 사후 고려의 정치 혼란과 개혁 세력
공민왕 사후 고려의 정치 혼란과 개혁 세력

1. 공민왕 사후 고려의 정치는 왜 혼란해졌을까

공민왕은 원의 간섭을 줄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개혁을 추진했지만,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고려 조정은 다시 권력 다툼에 휩싸였습니다. 어린 우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을 보좌하는 정치 세력의 영향력이 커졌고, 이인임을 비롯한 인물들이 정국을 주도했습니다. 공민왕 시기에 추진되었던 개혁은 힘을 잃었으며, 권문세족과 기존 관료 세력도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한편 고려는 원과의 관계가 약해진 뒤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두고 조정 내부의 입장이 달랐고, 외교 문제는 국내 정치 갈등과도 연결되었습니다. 여기에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면서 해안 지역의 피해가 커졌고, 국가는 군사력과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과제까지 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공민왕 사후의 혼란은 단순히 왕이 바뀌어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왕권이 충분히 안정되지 못한 가운데 기존 지배 세력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외교·군사 문제까지 겹치면서 고려의 정치 질서는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2. 신진사대부는 왜 개혁을 요구했을까

정치적 혼란과 사회 문제 속에서 신진사대부는 새로운 개혁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유학자들로,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의 문제를 비판했습니다. 이색과 정몽주, 정도전 등은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보이기도 했지만, 고려 사회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 고민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특히 권문세족이 토지와 노비를 확대하고 정치적 특권을 유지하는 현실은 국가 재정과 농민 생활에 부담을 주었습니다. 이에 신진사대부 가운데 일부는 토지 제도를 정비하고 부당하게 확대된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관리의 도덕성과 책임을 강조하고, 성리학적 원칙에 따라 국가 운영을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진사대부가 처음부터 하나의 정치 집단으로 움직인 것은 아닙니다. 기존 왕조를 유지하면서 개혁하려는 인물도 있었고, 정치 질서 자체를 크게 바꾸려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개혁의 방향과 속도를 둘러싼 차이는 이후 고려 말 정치 세력의 분화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들의 개혁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실제 군사력과 정치적 기반도 필요했습니다. 이때 왜구 토벌과 북방 방어에 참여하며 군사적 명성을 쌓은 무장들이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신진사대부에게 군사 세력과의 협력은 개혁을 현실 정치에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지만, 동시에 군사력을 가진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될 가능성도 안고 있었습니다.

3. 이성계의 성장과 고려 말 권력 변화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과 북방의 군사적 긴장이 이어지면서 유능한 무장들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이성계는 동북면을 기반으로 성장한 무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며 군사적 영향력을 높였습니다. 1380년 황산 전투에서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왜구를 크게 물리친 일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군사적 성과는 이성계가 조정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고려의 정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군사적 명성이 높아졌다고 해서 고려의 문제들이 곧바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여전히 권력 다툼이 이어졌고, 토지 제도와 국가 재정 문제도 남아 있었습니다. 신진사대부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치적 동맹과 군사적 기반이 필요했으며, 일부는 이성계와 협력하면서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반면 기존 정치 세력과 개혁 세력 사이의 갈등은 점차 커졌습니다. 특히 명나라가 철령 이북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하자 고려 조정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최영은 요동 정벌을 추진했고, 이성계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하며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습니다. 1388년의 위화도 회군은 단순한 군사 작전의 변경을 넘어 고려 조정의 권력 구도를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최영은 제거되고 우왕은 폐위되었으며, 이성계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습니다. 이후 이성계 세력은 신진사대부와 협력해 토지 제도 개혁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고려를 유지하며 개혁하려는 입장과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입장 사이의 차이도 점차 뚜렷해졌습니다.

4. 마무리

공민왕 사후 고려는 왕권의 불안정과 권력 다툼, 외교 갈등, 왜구의 침입이 겹치면서 정치적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기존 지배 질서의 문제를 비판하고 토지 제도와 국가 운영을 개혁하려 했습니다. 동시에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이성계가 군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신진사대부와 이성계 세력의 협력은 고려 말 개혁을 추진하는 힘이 되었지만, 모든 인물이 같은 목표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통보와 요동 정벌 논쟁은 기존 정치 세력과 새로운 세력 사이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권력 구조는 크게 달라졌으며, 토지 제도 개혁과 왕조 교체를 둘러싼 논의도 본격화되었습니다. 다음에는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배경과 전개, 그리고 고려 멸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